AI와 신앙

AI가 쓴 기도문은 기도인가 — 매개와 진정성

상황을 입력하면 정갈한 기도문이 나온다. 병상의 어머니를 위한 기도, 수험생 자녀를 위한 기도, 주일 대표기도. 생성형 AI는 상황에 맞는 성경 구절까지 엮어 몇 초 만에 문장을 돌려준다. 실제로 기도문 생성을 내세운 앱과 서비스가 늘고 있고, 대표기도 원고를 AI로 준비하는 일은 이미 낯설지 않다. 그리고 어떤 서비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용자를 '위해' 기도해 준다는 감각까지 판다.

미리 밝혀 둔다. 이 글은 기도의 언어가 궁해 도움을 구하는 이들을 정죄하지 않는다. 말문이 막히는 것은 신앙의 미숙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이 늘 겪어 온 곤경이다(롬 8:26이 바로 그 곤경을 전제한다). 이 글이 겨누는 것은 도구를 쓰는 개인이 아니라, 그 사용 위에 얹히기 쉬운 전제, 곧 '좋은 문장이 곧 좋은 기도'라는 등식이다. 나는 이 물음을 성경의 기도 이해와 고전 오순절 영성의 자리에서 다룬다.

빌려 쓰는 문장들 — 현상의 정리

먼저 대상을 구분한다. AI가 기도에 개입하는 자리에는 성격이 다른 세 층위가 있다. 첫째는 보조다. 내가 쓴 기도문을 다듬고, 표현을 고르고, 성경 구절을 찾는 일이다. 둘째는 대필이다. 상황을 입력하면 완성된 기도문이 산출되고, 나는 그것을 읽는 일이다. 셋째는 대행이다. 기계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준다는 감각, 곧 기도 행위 자체를 산출물로 소비하는 일이다. 보조에서 대행으로 갈수록, 기술은 표현의 도구에서 기도하는 주체의 대체물로 이동한다.

이 구분을 세우고 나면,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교회는 본래 남의 문장으로 기도해 왔다는 것이다. 시편은 삼천 년 된 남의 기도문이고, 주기도문은 주님이 주신 기도문이며(마 6:9-13), 공동기도서 전통의 교회들은 지금도 정해진 문장으로 함께 기도한다. 매개된 기도, 빌린 언어의 기도는 그 자체로 새로운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물음은 '빌린 문장인가 내 문장인가'가 아니다. 무엇이 문장을 기도로 만드는가이다.

무엇이 문장을 기도로 만드는가 — 정의

성경은 기도를 문장의 품질로 정의하지 않는다. 주님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마 6:7) 하셨다. 말이 많고 정교하다고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시편의 기도는 정제되지 않은 탄식과 항의까지 품으며, 바울은 아예 말이 무너지는 지점을 기도의 깊은 자리로 서술한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기도의 성립 조건은 문장이 아니라 관계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믿음과 정직, 그리고 그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이다.

그렇다면 시편과 주기도문은 어떻게 '남의 문장'이면서 기도가 되는가. 전유(專有, appropriation) 때문이다. 기도자는 그 문장을 하나님 앞에서 자기 것으로 삼는다. 시편의 탄식에 내 탄식을 싣고, 주기도문의 '우리'에 내가 들어간다. 공동기도서 전통에서도 기도인 것은 인쇄된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으로 지금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다. 빌린 언어는 전유될 때 기도가 되고, 전유되지 않으면 마 6:7이 말한 반복에 머문다. 이 기준은 AI 이전에도 참이었고, AI 이후에도 참이다.

고전 오순절 영성의 자리 — 성령 안에서의 기도

내가 서 있는 고전 오순절 신앙은 이 지점을 특히 예민하게 읽는다. 오순절 영성의 기도는 다듬어진 원고보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유 1:20)를 앞세워 왔다. 즉흥의 자유기도, 부르짖음, 그리고 방언기도가 그것이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의 언어는 수사(修辭)로는 무의미한 소리이지만, 오순절 신앙은 그것을 성령이 주시는 발화로, 이해를 넘어서는 교제로 받아 왔다.1 이 전통이 증언하는 바는 분명하다. 기도의 무게중심은 문장의 세련됨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에게 있다. 프랭크 마키아가 방언을 두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식'(롬 8:26)의 신학으로 읽어 낸 것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물론 마키아의 강조점이 고전 오순절주의와 온전히 겹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의 본질이 언어의 완성도 바깥에 있다는 통찰은 공유된다.2

이 자리에서 보면 AI 기도문의 위험은 문장이 남의 것이라는 데 있지 않다. 위험은 방향이 뒤집히는 데 있다. 전유의 전통에서 문장은 기도자를 하나님 앞으로 데려가는 사다리였다. 그런데 주문형 산출은 사다리를 오르는 수고 자체를 없애 준다. 상황 입력과 산출 소비 사이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 말을 고르며 마음을 살피는 시간, 말이 막혀 성령의 탄식에 기대는 시간이 사라질 수 있다. 표현의 외주가 마음의 외주로 이어질 때, 기도는 드리는 행위에서 소비하는 산출물로 바뀐다. 그리고 기술은 이 전환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마찰 없이, 아주 편리하게 허용한다.

반론 — 매개의 전통과 표현의 사다리 편에서

정직한 분별은 반대편의 최선을 세운 뒤에 성립한다. 첫째, 전통의 반론이다. 교회가 시편과 주기도문과 기도서로 기도해 왔다면, AI 문장도 같은 재료의 목록에 추가될 뿐 아닌가. 매개를 문제 삼으려면 시편부터 문제 삼아야 하지 않는가. 둘째, 사다리의 반론이다. 언어가 빈곤한 초신자, 병상에서 말을 잃은 사람, 대표기도가 두려운 성도에게 잘 만들어진 기도문은 기도를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기도로 오르는 사다리가 된다. 셋째, 중심의 반론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문장의 출처가 어디든, 드리는 마음이 진실하면 기도가 아닌가.

재반론 — 검증된 전통과 주문형 산출은 다르다

셋째 반론은 그대로 받는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AI가 다듬은 문장으로 드린 진실한 기도는 기도다. 이 글의 결론은 그 반대가 아니다. 둘째 반론도 절반은 받는다. 사다리는 실제로 필요하다. 다만 사다리의 가치는 오르게 하는 데 있다. 언제까지나 대신 읽어 주는 사다리는 사다리가 아니라 의자다.

첫째 반론에는 구분으로 답한다. 시편과 주기도문과 공동기도서는 단지 '남의 문장'이 아니다. 시편은 성경으로 주어진 계시의 기도 언어이고, 주기도문은 주님이 친히 가르치신 기도이며, 공동기도서는 교회 공동체가 세대에 걸쳐 신학적으로 검증하고 책임져 온 전통이다. 그 문장들에는 검증의 주체와 책임의 계보가 있다. 반면 AI 산출문은 학습 데이터가 조건 짓는 확률적 조합이며, 그 신학을 검증한 주체도 책임지는 계보도 없다. 그럴듯한 경건의 언어에 미묘하게 어긋난 신학이 섞여도, 산출물은 사과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AI 문장은 재료의 목록에 추가될 수 있으나, 시편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다. 재료로 쓰려면 검증이 필요하고, 검증의 책임은 결국 기도하는 사람과 그가 속한 공동체로 돌아온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덧붙인다. 대행, 곧 기계가 나를 위해 기도해 준다는 셋째 층위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선 인격의 행위이며, 기계는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다. 중보(仲保)는 그리스도의 일이고(딤전 2:5; 롬 8:34), 성도의 서로 기도는 공동체의 일이다(약 5:16). 산출을 기도의 대행으로 소비하는 것은, 기도를 가장 닮은 모양으로 기도를 건너뛰는 일이다.

하나의 분별

종합한다. AI가 만든 문장은 기도의 재료가 될 수 있다. 말이 궁한 날의 마중물이 될 수 있고, 표현을 다듬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문장을 기도로 만드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말을 자기 것으로 삼고 책임지는 사람의 믿음이다. 그리고 말이 끝내 막히는 자리는 결함이 아니라 약속의 자리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간구하신다(롬 8:26). 나의 분별은 한 문장이다. 기도문은 생성될 수 있으나 기도는 생성되지 않으며, 기도는 오직 하나님 앞에 선 사람에게서, 성령 안에서 드려진다.

AI 기도문을 쓰기 전에 물을 것

  1. 지금 나는 어느 층위에 있는가. 표현의 보조인가, 대필인가, 대행의 소비인가.
  2. 산출된 문장을 하나님 앞에서 내 것으로 삼는 전유의 시간이 있는가, 읽고 끝나는가.
  3. 그 문장의 신학을 검증했는가. 성경과 어긋나는 표현이 섞여 있지 않은가.
  4. 이 도구가 기도로 오르는 사다리로 쓰이고 있는가, 기도를 대신하는 의자가 되고 있는가.
  5. 말이 막힐 때, 산출 버튼보다 먼저 성령의 도우심(롬 8:26)에 기대고 있는가. 그리고 언어가 궁한 이웃을 정죄하지 않고 함께 기도하는 자리로 초대하고 있는가.

Footnotes

  1. 여기서 '고전 오순절주의'는 교단 소속이 아니라 신학적 명제로 규정한다. 곧 성령침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가 방언이라는 명제를 인정하며, 경험을 신학의 전제로 삼는 은사주의와 달리 성경 본문(특히 누가-행전)을 전제로 두고 성령의 현재적 경험으로 그 본문을 검증·구체화하는 입장이다. 성경신학적 정초로는 Roger Stronstad, The Charismatic Theology of St. Luke (Peabody, MA: Hendrickson, 1984); Robert P. Menzies, Empowered for Witness: The Spirit in Luke-Act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를 보라. 본문에서 방언기도에 관한 서술은 이 노선의 일반적 이해를 요약한 것이다.

  2. Frank D. Macchia, "Sighs Too Deep for Words: Toward a Theology of Glossolalia," Journal of Pentecostal Theology 1, no. 1 (1992): 47–73. 방언을 롬 8:26의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연결해 읽는 논지의 요약이다(쪽수 범위 내 구체 위치는 확인 필요). 본문에서 밝혔듯 마키아는 신유·은사의 현재적·즉각적 성격보다 상징적 의미를 앞세우는 경향이 있어, 고전 오순절주의의 강조와는 관점의 틈이 있다.

신학자이자 AI 교육전문가 이진민

글쓴이 · 이진민

기술의 가능성과 사람의 책임.

조직신학자 · AI 활용 교육전문가

조직신학과 오순절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교회·학교·공공기관에서 생성형 AI 교육과 컨설팅 활동을 합니다. 신학자로서 기술을 읽고, 교육자로서 그것을 현장에서 쓸 수 있는 판단 기준을 고민하고 제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조직신학 · 오순절 신학AI 리터러시 · 연구와 수업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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