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의 인문학

표준은 회의장 밖에서도 쓰인다

통신사 17곳이 입장문을 냈다.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3GPP 회의를 앞두고, 이들은 5G 단독모드(SA) 코어망에 쏟아부은 투자를 그대로 지켜 달라고 요구했다.1 시장조사업체 옴디아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6G 코어망에 AI를 넣는 방식을 둘러싸고 적어도 세 갈래 안이 경쟁한다. 기존 코어망에 AI 기능만 얹는 쪽과, AI 에이전트를 중심에 놓고 코어망 구조 자체를 다시 짜는 쪽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다. 이 거리를 좁히는 자리가 공식 회의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비슷한 무게의 결정이 회의장 밖에서도 이미 내려지고 있다.

마드리드 앞의 열일곱

통신사 엔지니어는 두 설계안을 책상 위에 나란히 펴 놓는다. 하나는 기존 5G SA 코어망에 AI 기능 모듈만 얹는 안이고, 다른 하나는 AI 에이전트를 중심에 두고 코어망 구조 자체를 다시 짜는 안이다. 이미 투입한 설비 투자를 살릴 수 있는 쪽과, 기술적으로 더 앞선 구조를 택하는 쪽 사이에서 선택은 쉽지 않다. 옴디아는 이 선택이 기술적으로 바람직한 방향과 상업적으로 감당 가능한 방향이 쉽게 겹치지 않는 지점에서 갈린다고 짚었다.1

17개 통신사가 공동 입장문을 낸 시점도 눈에 걸린다. 입장을 미리 모아 발표한 행위는 회의장 안에서 벌어질 논쟁의 틀을 미리 좌우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회의는 아직 열리지 않았다.

3GPP라는 틀은 분명 공식 표준화 기구다. 통신사·장비사·연구기관이 함께 참여해 합의를 거친다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 합의조차 이미 투자를 많이 한 쪽의 목소리가 더 크게 반영되는 구조 안에서 이뤄진다. 절차는 공식적이어도, 그 절차를 채우는 힘은 균등하지 않다.

버려진 데이터의 이름

원프레딕트 윤병동 대표는 제조 현장에서 가장 큰 문제로 파편화된 데이터 구조를 꼽았다.2 설비 상태를 확인하는 기록, 생산 결과를 적어 두는 기록은 대부분 한 번 쓰이고 버려진다. 제품이나 공정 조건과 연결되지 못한 채 남기 때문이다.2

한 공정 담당자는 설비 로그를 저장할 때 그 기록을 제품 번호와 공정 조건에 묶지 않고, 그날의 점검표에만 적어 넣는다. 다음 날이면 그 로그는 다시 조회되지 않는다. 원프레딕트가 자산화라는 말을 꺼낸 자리는 정확히 이 지점이다.2

자산화라는 말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을 정의하고 기준을 세운 주체는 원프레딕트라는 한 기업이다. 외부 기구가 검증하거나 합의한 정의가 아니다. 이 정의를 따르는 공장이 늘어날수록, 데이터를 어떻게 쌓고 어떻게 연결할지를 정하는 기준은 그 기업의 틀 안으로 모인다.

지침과 규칙 사이

오픈AI는 지난 2일 GPT-6 패밀리를 위한 모델 가이드를 블로그에 올렸다. 스타트업이 어떤 GPT-6 모델을 고를지, 추론 강도를 어떻게 조절할지, 프롬프트와 스킬을 어떻게 다듬을지, 도구를 어떻게 연결할지, 프로덕션 환경을 어떻게 준비할지를 안내하는 문서다.3

스타트업 개발자는 이 가이드를 펴 놓고 추론 강도 항목부터 확인한다. 기본값으로 돌린 응답과 강도를 높인 응답을 나란히 띄워 비교한다. 차이가 드러나면 코드의 설정값을 바꿔 넣는다.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이 문서는 어디까지나 안내문이고, 따르지 않아도 되는 권고일 뿐이라는 시각이다. 가이드를 어겼다고 해서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 점에서 오픈AI의 모델 가이드는 3GPP 표준과 분명히 다르다.3 그러나 대체할 공식 기준이 따로 없는 스타트업에게, 이 문서는 사실상 운영 규칙의 자리를 채운다.

저마다의 책상

세 장면 가운데 외부 합의 절차를 거쳐 구속력을 얻는 자리는 3GPP뿐이다. 원프레딕트의 선언과 오픈AI의 가이드는 각 기업이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내놓은 지침이다. 원프레딕트는 자산화 플랫폼을 파는 회사이고, 오픈AI는 GPT-6를 파는 회사다. 둘 다 규칙을 쓰는 자리가 아니라 상품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출발했다.

그런데도 이 세 자리는 실제로 비슷한 기능을 한다. 통신사는 공동 입장문에 맞춰 투자 계획을 짠다. 제조 현장은 원프레딕트의 자산화 기준에 맞춰 데이터 저장 방식을 바꾼다. 스타트업은 오픈AI의 가이드에 맞춰 코드를 수정한다. 절차적 정당성은 3GPP에 남아 있지만, 실제로 누군가의 하루를 바꾸는 힘은 이미 세 자리로 흩어졌다.

표준을 쓰는 자리가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달라진 지점이다.

통신사의 회의장, 제조사의 발표 자리, 모델 제공사의 블로그가 각각 자기 책상에서 AI를 인프라에 들이는 규칙을 적어 내려간다. 책임의 무게는 세 책상에 고르게 나뉘지 않았는데도, 그 위에서 쓰인 문장은 똑같이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읽힌다.

각주

  1. 6G 코어망에 AI 어떻게 넣나...표준 설계부터 갑론을박 — zdnet.co.kr, 2026-10-04 발행, 2026-10-05 접속 확인. ↩ ↩2

  2. 원프레딕트 “버려지던 제조 데이터, AI 자산으로 바꾸겠다” — www.aitimes.com, 2026-10-04 발행, 2026-10-05 접속 확인. ↩ ↩2 ↩3

  3. A model guide for the GPT-6 family — openai.com, 2026-10-02 발행, 2026-10-05 접속 확인. ↩ ↩2

신학자이자 AI 교육전문가 이진민

글쓴이 · 이진민

기술의 가능성과 사람의 책임.

조직신학자 · AI 활용 교육전문가

조직신학과 오순절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교회·학교·공공기관에서 생성형 AI 교육과 컨설팅 활동을 합니다. 신학자로서 기술을 읽고, 교육자로서 그것을 현장에서 쓸 수 있는 판단 기준을 고민하고 제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조직신학 · 오순절 신학AI 리터러시 · 연구와 수업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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