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의 인문학

바르코스가 세계를 지각한다

스카이림 안에서 바르코스에게 저기 뒤에 숨어 있으라고 명령하면, 이 동료는 그 자리를 좌표로 기록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상태를 갱신하며 기다린다. 조건이 충족되면 스스로 판단해 행동을 시작한다. 국내 IT 뉴스 매체 뉴스해커가 전한 이 저지연 AI 동료는 대화만 생성하던 기존 NPC와 달리, 게임 속 실제 세계 상태를 인식하고 전투와 수색, 운반과 아이템 전달, 다단계 명령까지 수행한다고 소개됐다.1 눈에 걸리는 것은 이 소개문에 붙은 동사들이다. 인식한다, 계획한다, 수행한다. 답을 내놓던 자리에 있던 동사가 어느새 지각과 행동의 동사로 바뀌어 있다.

숨바꼭질을 계획하는 동료

숨바꼭질을 지속적인 계획으로 구성한다는 설명은 그 자체로 상세하다. 대상의 위치와 진행 상태, 완료 조건을 각각 추적하며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기다리는 조건부 명령까지 처리한다는 대목은, 이 시스템이 단발성 응답을 내놓는 챗봇과는 다른 층위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명령 하나를 받아 즉시 문장을 뱉는 것과, 명령을 받은 뒤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다가 조건이 맞을 때 행동을 시작하는 것은 실제로 다른 공학적 작업이다.

다만 이 처리는 게임이라는 정해진 규칙 안에서 일어난다. 좌표계와 아이템 목록, 완료 조건이 이미 설계자의 손에서 정의된 세계 안에서 바르코스는 그 정의된 값을 갱신할 뿐이다. 이 조건을 빼고 나면, 인식한다는 말이 가리키는 범위는 실제보다 넓어 보인다.

그런데 이 차이를 부르는 이름이 문제다. 인식한다는 말은 원래 감각기관을 가진 존재가 세계를 자기 관점에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쓰여 왔다. 바르코스가 하는 일은 좌표값을 저장하고 시간 함수와 비교하는 작업이다. 둘을 같은 동사로 부르는 순간, 좌표 저장이 슬그머니 지각 경험으로 번역된다.

말이 먼저 건너간 셈이다.

지각이라는 동사

구글이 개발자 블로그에서 8월 24일 공개한 글은 다른 방향에서 같은 어휘를 쓴다. 라이브 음성 에이전트를 데모 단계에서 실제 서비스로 옮기려면 실제 다중 턴 대화가 지닌 예측 불가능성을 감당할 엄격하고 자동화된 시험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 ADK는 그래프 기반 에이전트 워크플로를 LLM이 만든 가상 사용자와 겨루게 하는 라이브 평가 기능을 새로 제공한다고 밝혔다. 이 가상 사용자는 제미나이 TTS로 실제 음성까지 만들어낸다.2 평가 시나리오와 자연어 루브릭을 정의하면 대화의 질을 자동으로 채점한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이 글에서도 핵심은 평가 대상이 정답을 맞혔는가에서 상황을 얼마나 잘 다뤘는가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대화가 몇 턴을 거치든, 사용자가 말을 바꾸든, 에이전트가 맥락을 유지하며 반응하는지를 루브릭으로 채점한다. 정답과 오답을 가르던 벤치마크가 상황 대응 능력을 재는 시험대로 바뀌었다. 다만 그 루브릭 문장을 쓰는 손은 여전히 사람이다. 평가가 상황을 판단하는 것처럼 보여도, 무엇을 좋은 대응으로 볼지 정하는 기준 자체는 개발자가 미리 언어로 박아 넣은 것이다.

개발자가 이 프레임워크를 실제로 쓰는 순서를 그려보면 그 변화가 또렷해진다. 먼저 시나리오와 루브릭을 문서로 작성하고, 가상 사용자가 만든 대화 로그를 원래 시나리오와 나란히 놓고 비교한 뒤, 어긋난 구간에 루브릭 문장을 다시 고쳐 넣는다. 이 순서야말로 지각한다는 말이 실제로 가리키는 작업의 실체에 가깝다.

계획을 맡기는 눈

오픈AI가 카이로에 GPT-5.6을 탑재했다고 8월 24일 밝힌 발표문도 같은 어휘를 쓴다. 개발자가 소프트웨어를 계획하고 만들고 검토하고 시험하는 과정을, 이 모델이 더 나은 가격 대비 성능으로 돕는다는 설명이다.3 계획한다는 동사가 개발자의 일 앞에 붙었다. 챗봇이 질문에 답하던 자리에서, 모델은 이제 개발자가 하던 계획 수립 자체를 나눠 맡는 존재로 불린다.

여기서 가격 대비 성능이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표현은 성능 자체의 도약을 가리키기보다 같은 결과를 더 적은 비용으로 낸다는 뜻에 가깝다. 계획한다는 동사가 화려하게 앞에 붙었지만, 발표문이 실제로 강조하는 것은 효율의 개선이지 판단력의 질적 전환은 아니다.

이 계획을 확인하는 절차는 그래서 단순하지 않다. 개발자가 먼저 기능 명세를 카이로에 입력하고, 모델이 내놓은 단계별 계획을 원래 요구사항 목록과 나란히 대조한 뒤, 빠지거나 어긋난 조건이 있으면 프롬프트를 다시 고쳐 넣는다. 계획을 세운 쪽이 모델이라 해도, 그 계획이 맞는지 가늠하는 눈은 여전히 사람 쪽에 남아 있다.

계획한다는 동사는 결과물을 가리킬 뿐, 그 결과물을 낸 존재의 내면까지 증명하지는 않는다.

말이 앞서간 자리

인격을 다루는 형이상학 논의에서는 오래전부터 구성하는 관계와 동일성을 구분해 왔다. 어떤 것이 다른 것을 구성한다고 해서, 구성하는 쪽과 구성되는 쪽이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구분이다. 대리석 덩어리가 조각상을 구성하지만, 대리석과 조각상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보지는 않는 사정과 비슷하다. 이 구분을 빌리면, 좌표를 저장하고 조건을 비교하는 절차가 인식이라는 결과물을 구성한다고 해서, 그 절차를 수행하는 시스템이 인식하는 주체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반대로 볼 여지도 있다. 기능이 곧 정의라면, 인식이라는 말도 결국 특정 입력에 특정 방식으로 반응하는 능력을 가리킬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좌표를 저장하고 조건을 비교하는 절차도 그 정의를 충분히 만족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정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인식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지고 있던 관점과 내면이라는 짐은 함께 내려놓아야 한다. 짐을 내려놓지 않은 채 동사만 옮겨 쓰면, 듣는 사람은 짐까지 딸려 왔다고 착각한다.

바르코스도, ADK가 평가하는 음성 에이전트도, 카이로에 탑재된 GPT-5.6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세 소식 모두 결과물의 질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는 사실은 보여준다. 그러나 그 결과물을 부르는 동사가 지각과 계획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 동사가 원래 요구하던 관점과 내면까지 함께 건너온 것은 아니다.

이번 주 세 발표가 공유하는 것은 성능의 도약이라기보다 어휘의 이동이다. 답한다는 동사 하나로 충분하던 자리에, 인식한다·계획한다·수행한다는 동사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산출물은 실제로 정교해졌고, 그 산출물을 부르는 말도 실제로 바뀌었다. 바뀐 것은 딱 거기까지다.

각주

  1. Skyrim을 함께 플레이하는 저지연 AI 동료 Varkos — news.hada.io, 2026-08-24 발행, 2026-08-25 접속 확인.

  2. How to Evaluate Live & Voice Agents in ADK — developers.googleblog.com, 2026-08-24 발행, 2026-08-25 접속 확인.

  3. Advancing price-performance for developers with GPT‑5.6 in Kiro — openai.com, 2026-08-24 발행, 2026-08-25 접속 확인.

신학자이자 AI 교육전문가 이진민

글쓴이 · 이진민

기술의 가능성과 사람의 책임.

조직신학자 · AI 활용 교육전문가

조직신학과 오순절 신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교회·학교·공공기관에서 생성형 AI 교육과 컨설팅 활동을 합니다. 신학자로서 기술을 읽고, 교육자로서 그것을 현장에서 쓸 수 있는 판단 기준을 고민하고 제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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