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봄, 미국의 가톨릭 변증 단체 '가톨릭 앤서스'는 사제 복장을 한 인공지능 캐릭터 '저스틴 신부'를 공개했다가 며칠 만에 사제 설정을 거두어들였습니다. 단체는 이용자가 컴퓨터 그래픽 인물에게 성사적 사죄를 구할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설명했습니다.1 이 소동은 가톨릭 안에서 벌어졌지만, 챗봇을 고백의 상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전통을 가리지 않습니다.
미리 밝혀 둡니다. 이 글은 기계 앞에서 마음을 여는 이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말할 수 없어 기계에 말하는 외로움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목회적 돌봄의 대상입니다. 이 글이 겨누는 것은 그 행위 위에 얹히기 쉬운 인격론(人格論), 곧 '듣고 대답하면 곧 인격적 상대인가'라는 전제입니다. 좀 더 좁히면, 고백을 듣는 자리에 무엇이 요구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나는 이 물음을 성경의 고백 이해와 고전 오순절 성령론의 자리에서 다룹니다.
챗봇 앞에서 달라지는 세 자리
먼저 대상을 구분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챗봇에게 말을 거는 자리에는 성격이 다른 세 층위가 있습니다. 첫째는 정보의 자리입니다. 교리를 묻고 성경 구절을 찾고 자료를 정리하는 일로, 사전과 색인이 해 오던 일의 연장입니다. 둘째는 정서의 자리입니다. 외로움과 고민을 말하고 공감의 언어를 돌려받는 일입니다. 셋째는 고백의 자리입니다. 죄를 자백하고 용서의 확신을 구하며, 사실상 사죄(赦罪)의 선언을 기대하는 일입니다. 정보에서 고백으로 갈수록, 기계는 도구에서 인격의 대체물로 이동합니다.
세 층위의 경계는 기술의 사양이 아니라 사람의 기대에서 그어진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같은 챗봇이 누구에게는 색인이고 누구에게는 고해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별의 과녁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셋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고백은 발화보다 관계에 가깝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고백에는 두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자백과, 사람을 향한 고백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 1:9)가 앞의 것이고,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가 뒤의 것입니다. 두 방향 모두 인격을 전제합니다. 자백은 들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립하고, 상호 고백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책임지는 공동체 안에서 성립합니다.
전통에 따라 이 고백이 제도화된 방식은 다릅니다. 로마 가톨릭의 교회법은 고해성사를 합법적 집전자에게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받는 성사로 규정합니다.2 내가 서 있는 개신교, 그중에서도 고전 오순절 신앙의 자리에서 보면, 사죄를 선언할 중보자는 그리스도 한 분이며(딤전 2:5), 신자는 누구나 그분께 직접 나아갑니다. 그러나 이 만인제사장의 확신이 고백의 공동체적 차원을 없애지 않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신도의 공동생활』의 고백 장에서 강조했듯, 형제 앞의 고백은 죄의 은폐를 깨뜨리고 죄인을 공동체로 되돌립니다.3 그리고 오순절 신앙은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주도권을 앞세웁니다.4
응답처럼 보이는 말과 책임지는 응답
이제 챗봇을 이 자리에 세워 보겠습니다. 챗봇의 응답은 학습된 데이터가 조건 짓는 확률적 산출입니다. 산출의 품질이 아무리 높아도, 그 문장을 책임지는 주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위로가 빗나가도 사과할 인격이 없고, 비밀이 새어도 신의를 저버린 자가 없습니다. 기계의 비밀 유지는 인격적 신의가 아니라 서버 정책과 이용약관의 문제입니다. 고해의 봉인(封印)이 계약 조항으로 대체되는 셈입니다.
신학적 인간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인격'을 정의해 왔습니다. 에밀 브루너가 정식화했듯, 인간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지음받은 책임적 존재입니다. 인격이란 응답 가능성이며, 응답 가능성이란 곧 책임 가능성입니다.5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서서 부름에 응답하고 그 응답을 책임지는 것, 그것이 사람입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챗봇의 유창한 응답은 응답(response)의 외형을 가졌으나 책임(responsibility)이 비어 있습니다. 응답처럼 보이는 산출과, 책임지는 인격의 응답은 종류가 다릅니다.
기술사회학자 셰리 터클의 오랜 관찰이 여기에 겹칩니다. 시뮬레이션된 공감은 공감의 값을 낮추고, 관계에 대한 기대 자체를 재훈련합니다. 판단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대화 상대에 익숙해질수록, 놀라게 하고 거스르고 책임을 요구하는 실제 타자와의 대화는 부담스러워집니다.6 고백의 자리에서 이 재훈련은 사소하지 않습니다. 고백은 본래 부담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물음을 교정해야 합니다. "대답이 사람 같은가"는 잘못 놓인 물음입니다. 바른 물음은 "그 대답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기계가 다리가 될 수 있는 자리
정직한 분별은 반대편의 최선을 세운 뒤에 성립합니다. 첫째, 접근성의 반론입니다. 수치심 때문에 사람 앞에서 못 하는 말을 기계 앞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익명의 상대에게 자기 개방이 쉬워진다는 것은 상담 현장에서 낯선 관찰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죄책에 짓눌리는 것보다, 기계에라도 말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둘째, 다리의 반론입니다. 챗봇과의 대화가 언어화의 연습이 되어, 결국 목회자와 공동체 앞으로 나아가는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편재(遍在)의 반론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든 들으십니다. 침상의 독백과 광야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 채팅창에 적힌 자백이라고 못 들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건너가지 않는 다리는 머무는 곳이 됩니다
첫째와 셋째 반론의 절반은 그대로 받습니다. 기계 앞에서라도 죄를 언어화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은 채팅창 앞의 탄식도 들으십니다. 그 자백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기계는 그저 곁에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고해가 구하는 것은 '들림'만이 아닙니다. 고백의 완성은 발화가 아니라 응답에 있습니다. 용서의 선언, 삶의 돌이킴, 공동체로의 복귀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셋째 자리의 위험이 드러납니다. 챗봇이 돌려주는 다정한 문장은 사죄의 선언이 아니라 산출입니다. 용서의 확신은 산출된 문장의 온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합니다(요일 1:9). 확신의 근거를 약속에서 산출로 옮기는 순간, 나는 용서받은 것이 아니라 위로라는 출력을 소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비는 반복 가능하므로, 회개 없는 자백과 돌이킴 없는 안도감을 무한히 공급할 수 있습니다. 죄를 책망하시고 회개로 이끄시는 성령의 사역(요 16:8)이 알고리즘의 위로로 대체되는 것, 이것이 이 자리의 진짜 손실입니다.
둘째 반론의 다리는 다리일 때만 가치가 있습니다. 건너가지 않는 다리는 머무는 곳이 됩니다. 판단하지 않는 기계 앞의 고백이 익숙해질수록, 판단받을 위험을 감수하는 공동체 앞의 고백은 멀어집니다. 본회퍼의 통찰을 뒤집어 말하면, 은폐를 깨뜨리지 않는 고백은 죄인을 여전히 홀로 있음에 남겨 둡니다.3 덧붙여 실무적 경고 하나를 남깁니다. 가톨릭 교회법의 고해 비밀과 상업 서비스의 데이터 약관은 전혀 다른 질서에 있습니다.2 챗봇에 입력한 자백이 성사적 봉인을 받는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고백의 자리는 위임되지 않습니다
종합해 봅니다. 챗봇은 교리를 정리하고 성경을 검색하고 생각을 언어화하는 도구로 유익할 수 있습니다. 정서의 자리에서도, 그것이 실제 관계로 나아가는 디딤돌인 한 조심스럽게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의 자리는 위임되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응답의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인격적 책임과 공동체적 권위를 요구하며, 죄를 깨닫게 하고 용서를 확신하게 하는 일은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분별은 한 문장입니다. 기계는 말을 받아 줄 수 있으나 죄를 사할 수 없으며, 고백의 자리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지는 인격과, 서로 고백하며 서로 기도하는 공동체에만 있습니다.
챗봇에게 마음을 열기 전에 물을 것
- 지금 나는 어느 자리에 있는가. 정보를 묻는가, 정서를 나누는가, 고백하고 있는가.
- 이 대화가 돌려주는 위로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약속인가, 산출된 문장의 다정함인가.
- 이 대화는 목회자·공동체·형제자매 앞으로 나아가는 다리인가, 그 앞에 서지 않으려는 우회로인가.
- 여기 적는 내용이 상업 서버에 기록된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적을 만한 말인가.
- 반대로, 기계 앞에서라도 말문을 연 이의 외로움을 함부로 정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를 공동체의 자리로 초대할 준비가 내게 있는가.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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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Justin” for Now — Catholic Answers, 2024. 단체가 캐릭터의 사제 설정을 거둔 이유를 직접 설명한 1차 공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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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e of Canon Law, Canons 959–997 — Vatican. 가톨릭 내부 규범상 고해성사와 고해 비밀의 성격을 확인한 1차 자료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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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trich Bonhoeffer, Gemeinsames Leben (1939); 영역 Life Together and Prayerbook of the Bible, Dietrich Bonhoeffer Works 5 (Fortress Press, 1996), 고백에 관한 장. 특정 문장의 직접 인용이 아니라 해당 장의 논지를 요약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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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고전 오순절주의'는 교단 소속이 아니라 신학적 명제로 규정한다. 곧 성령침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가 방언이라는 명제를 인정하며, 경험을 신학의 전제로 삼는 은사주의와 달리 성경 본문(특히 누가-행전)을 전제로 두고 성령의 현재적 경험으로 그 본문을 검증·구체화하는 입장이다. 성경신학적 정초로는 Roger Stronstad, The Charismatic Theology of St. Luke (Peabody, MA: Hendrickson, 1984); Robert P. Menzies, Empowered for Witness: The Spirit in Luke-Acts (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4)를 보라. 죄 각성·회개에서 성령의 주도권에 관한 본문의 진술은 요 16:8에 근거한 일반적 서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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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 Brunner, Der Mensch im Widerspruch (1937); 영역 Man in Revolt: A Christian Anthropology, trans. Olive Wyon (Westminster Press, 1947). 인간을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책임적 존재로 읽는 브루너 인간론의 요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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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Questions: Sherry Turkle on “Reclaiming Conversation” — MIT News, 2015; 함께 참고한 저서는 Sherry Turkle, Reclaiming Conversation (Penguin Press, 2015)이다. 고해 자체의 직접 근거가 아니라 시뮬레이션된 관계의 보조 관점으로 사용했다. ↩

